에반게리온: 서 YOU ARE (NOT) ALONE

결론부터 말하면, 낚시인 줄 알면서도 덥석 물었는데, 젠장, 떡밥이 맛있어, 랄까.

저기 구석에 처박아 놓은 동영상 CD들 뒤져서 먼지 쌓인 에바 찾아 야근 후에 TV판 복습하기를 며칠째. 그리고 어제 용산CGV에서 '에반게리온: 서'를 보았다. 덕후분위기가 날까 걱정했는데 예상 외로 관객도 많고 상큼한 분위기여서 오히려 당혹. 그래도 이토록 남성점유율이 높은 영화는 오래간만이었다. 영화제도 아닌데 스탭롤 끝날 때까지 대부분의 사람이 앉아 있는 경험도 드문 일. 미사토님의 서비스서비스가 끝나자 긴 침묵이 끝나고 갑자기 와글와글. 스탭롤 때 습관처럼 나가려던 사람들은 '이 사람들은 도대체 왜 안 나가고 앉아있는건가'라는 표정들. 아, 이런 분위기 좋아.

'서'는 전반적으로 TV판과 유사하지만 조금씩 틈이 있으니, '파'에 가서 전혀 다른 이야기 하려고 준비운동 하는 모습이다. 그러니까 이건 또 '파'를 위한 떡밥인 셈. ('파' 개봉할 땐 굳이 TV판 복습 안해도 될 듯.) 예전 극장판에 비해 좀 더 친절해졌을까 예상해보기도 했지만, 처음 에반게리온을 접하는 사람들에게 불친절하기로는 오십보 백보고, 여전히 떡밥 던지기에만 충실한 모습이었다. '파' 상영할 땐, 오덕들만 남아있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엄습.

사실 극장까지 가서 봐야하나라는 생각이 있긴 했는데, 야시마 작전을 보고는 극장에 오기 잘 했다며 스스로를 칭찬할 수 밖에 없었다. 사도 라미엘은 TV판이랑은 전혀 다른 존재가 되어 나타났는데, 변화무쌍한 정팔면체가 주는 위압감이라는 것이 상당해서, 무슨 본좌급 사도가 1탄부터 나오는거냐, 이건 사기야, 라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아, 전반적으로 메카닉한 측면들이 많이 부각되고 전투의 박력이 늘어난 탓에, '파'에서 나올 것으로 예상되는 신지+아스카 커플 댄스 어택에 대한 기대감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그와 반대로, 10대들의 우정어린 스쿨라이프가 거의 삭제되고 코믹한 요소들 역시 대개 삭제되어, 아스카의 등장이 어떤 분위기로 그려질지 걱정섞인 궁금증이 생겨나기도 한다.

몇가지 설정들이 바뀌었는데, 맨 처음 나오는 바다가 빨간 색인 것부터 '이건 다르다'라는 것을 말해준다. 첫 사도가 제3사도가 아니라 제4사도가 되었고 (따라서 라미엘은 제6사도), 네르프의 마크가 때에 따라 좀 다르며, 사도가 파괴되면 형체가 남지 않고 피바다가 되어버린다. (내가 좋아하는 장면 중의 하나가 신지가 스즈하라를 태우고 싸울 때 사도와 에바가 동시에 침묵해 서 있는 장면인데, 사도의 형체가 날아가버려 그 장면을 즐길 수 없었다.) 그리고 초호기가 막 색깔 입힌 프라모델 같은 반짝이 옷을 입었고, 프로그레시브 나이프가 폼 나게 바뀌었다. 레이의 미소가 바뀌었다는데 별 감흥 없었고, 레이의 11살짜리 가슴은 더 커진 듯. =_=;;;



하지만 무엇보다 달라진 것은 신지가 예전의 찌질이를 벗고 자의식이 훨씬 견고해져서 나타났다는 것. 방황하다가 미사토에게 돌아가겠다고 미행자들에게 말하는 장면이나 야시마 작전에서 한 방 맞은 후 다시 일어나 싸울 때, 그런 모습이 확실히 드러난다. 그러나 아직은 찌질이와 안찌질이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느낌이라 신지에 대해선 종잡을 수 없음이다. (하지만 평소엔 쳐다보지도 않던 아빠가 갑자기 불러서 '너 저거 타고 싸워' 라고 했더니 싸우는 걸 보면 기본적으로 찌질이. 안 탈거라 했더니 피 흘리며 과도하게 신음하는 레이 보여주고 '너 안타면 쟤가 탈거야' 라는 식으로 끌고 가는 아빠도 상찌질이.)

에바는 이제 어떻게 만들든 찬사와 욕을 동시에 먹고, 그러면서도 보는 사람들은 계속 보는 상황이니, 가이낙스는 그냥 그걸 즐기고 있는 것 같다. 벌써부터 나체 카오루를 박스에서 꺼내시거나, 미사토님이 신지에게 리리스를 보여주는 등, 상상할 수 없는 떡밥을 던져놓고 또 희희락락하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좀 분하다. 그렇지만 '파' 던져주면 또 덥석. 아, 더욱 분하다. 서른세살이나 먹었는데;;

by zaniface | 2008/01/28 12:05 | 트렁크 | 트랙백(3) | 핑백(1) | 덧글(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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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반게리온: 서 YOU ARE (NOT) ALONE난 에반게리온을 좋아한다.나의 에바 역사를 따라가자면...대학교때 들어와서 에바를 접했고..당시 내가 유일하게 정을 준 애니가 에바였다.. (지 ... more

Commented by Saga at 2008/01/28 14:05
제가 개인적으로 TV판과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생각했던 건, 야지마 작전 마지막에 직접 달려들어 레이를 구해주는 부분이었습니다. 왜 그게 차이점이냐 하면, 극장판에선 미사토가 신지에게 '0호기 폭주 때 겐도가 레이를 구해 준 이야기'를 해 주지 않았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려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이 녀석, 각성했구나'라는 느낌이 팍 들었습니다. 아버지하곤 별개로 자기의 의지를 드러내는 장면이었으니까요.
Commented by 은별 at 2008/01/28 14:29
크리스탈처럼 생긴 사도가 라미엘인가요? 진짜 무섭던데..
Commented by 9625 at 2008/01/28 14:39
하지만 신지나 겐도우가 상찌질이가 아니면 에바가 에바가 아니지요.
제가 보기에 찌질성에 비례하여 싱크로율이 높아지는 것이 에바니까요.
Commented by Hekate at 2008/01/28 15:08
가이낙스가 던져 주는 떡밥은 언제나 싱싱해서 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사실이 무척 울적하죠. 저는 그래도 그 어장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습니다. ;ㅅ;
Commented by 해밀 at 2008/01/28 15:26
에바는 제 운명이에요 하지만 왠지 가이낙스 돈 없어서 에바 너무 우려먹는것 같기도 하고.... 확실히 CG는 좋아졌지만 그림체는 뭔가 둥글해진 느낌... 그리고 우리의 미사토누님목소리 낮아지시고...ㅜ.ㅜ 내용이 좀 바뀔 것 같아요 특히 카오루가 헤븐스 게이트였나?거기 밑으로 내려가서 아담을 만나려고 했는데 그게 리리스였다는걸 알고 압사당하는게 좀 바뀌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어쨌든 파도 기대해 봅니다!
Commented by Stallion at 2008/01/28 16:20
저는 다른건 모르겠고, 자막이 마음에 안들었습니다. '침묵'을 '움직이지 않습니다'라고 표현한 부분은 에바 고유의 멋을 잃었다고 할까요..

글씨도 너무 흐릿해서 눈 나쁜 사람은 보기도 힘들고, 차라리 동영상 자막을 넣었어도 그정도는 아닐듯한데 말이죠..
Commented by ArborDay at 2008/01/28 16:24
하하하, 나이가 뭔 상관입니까. ㅠㅠ
Commented by 요르다 at 2008/01/28 17:20
맨 마지막줄에서 뿜었어요(...).
Commented by zaniface at 2008/01/28 21:01
/Saga: 아, 그렇게도 볼 수 있군요. 하지만 전 TV판에서의 신지도 자기 의지를 담아 레이를 구출했다고 생각해요. 아빠한테 레이 뺏기기 싫어서 따라한 수준은 아닌 것 같으니. ^^
/은별: 네 맞습니다. TV판에서는 그런 위압감은 없지요.
/9625: 찌질 싱크로율이었던겁니까. 신지가 타자마자 40% 넘기고 금세 아스카를 따라잡은 것을 보면 그럴지도;;
/Hekate: 안 던져주면 뭔가 기다리고 있다는 게 더 울적합니다.
/해밀: 개인적으로 그림체는 TV판이 더 마음에 들었습니다. 너무 예뻐진 것 같고, 라미엘은 그림이랑 좀 따로 노는 느낌도 받았고. '파'에서 무슨 이야기를 할지 모르겠지만 잘 우려먹으려면 상상 외의 것이 나오겠죠.
/Stallion: 저도 그거 맘에 안들었습니다. 뭔가 맛없는 자막이었지요. 몇몇 부분은 대사를 다 아니까 자막 볼 필요도 없어서 그냥 그림만 보기도 했습니다.
/ArborDay: 하하하. 극장 가니 어르신도 있더군요.
/요르다: 마지막 줄이 이 포스트의 포인트지요. =_=;;;
Commented by 나름대로 at 2008/01/28 22:14
전 다시금 제가 물고기 체질이라는걸 꺠달았습니다. 떡밥 참 맛나더군요 하핫.
Commented by 푸른달팽이 at 2008/01/28 22:28
근데 예고편에 왜 아스카가 안나오는걸까요..
게다가 포스터에 아스카가 없어요 T_T
http://pds8.egloos.com/pds/200801/28/62/e0058862_479d4d0fd560c.jpg
Commented by 마무리 at 2008/01/28 22:40
제가 알기론 이번 에바 극장판시리즈는 가이낙스 작품이 아니라 안노가 나와서 만드는 거라고 들었는데.. 아니었나요
Commented by zaniface at 2008/01/29 08:56
/나름대로: 사람들에게는 물고기적 본능이 내재되어있습니다. ㅎ
/푸른달팽이: '서'는 TV Ep.1~6까지라 안나오지만 '파' 예고편에 스쳐지나가듯;; 나옵니다.
/마무리: 저는 안노의 카라스튜디오와 가이낙스 공동 제작으로 알고 있었는데요.
Commented by 캬오 at 2008/08/11 22:07
ㅋㅋ 이제 댓글 달다니 좀 늦은감이 있네요(아니 많네요 -_-)

저도 오징어사도? 하고 싸우고 나이프 꽂은 상태로 작동정지 된 장면을
정말 기대했지만 안타깝게도......음; 그땐 참 멋있다고 생각했었는데요.


<< ㅋㅋ그리고 레이는 14살입니다. 즉 가슴도 14살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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